밤하늘 보호구역을 지정하자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입력 2023-04-18 18:01   수정 2023-04-26 12:16


장밋빛 황혼이 지난 뒤 땅그늘이 짙어지고 땅의 빛깔은 검게 변한다. 교외의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은 서둘러 전조등을 켠다. 밤은 지구가 자전으로 생기는 제 그림자 속에 잠기는 시간이다. 낮보다 밤의 시력이 더 좋은 숲속 올빼미와 박쥐들은 밤에 더 많이 활동한다. 다른 야행성 동물들도 눈동자에 추상세포와 간상세포가 훨씬 많은 탓에 밤의 시력이 더 좋다.
어둠 속에서 야생성은 번성한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숲속을 어슬렁거리는 포식자들의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은 곧 피식자의 피로 붉게 물든다. 어둠 속에서 야생성의 세계는 번성한다. 사막을 데우던 열기가 식으면 은하수와 별들이 쏟아질 듯 찬란한 밤하늘 아래 몽골 초원의 게르에서 유목민의 후예들은 잠든다.

밤은 예술가에게 영감과 창조의 촉매다. 잘 익은 과일처럼 향기로운 밤의 고독 속에서 시인은 시를 빚는다. 밤은 연인들에게는 더 많은 사랑할 시간을 베푼다. 아울러 밤은 어둠의 확고한 극단 속에서 이뤄지는 잠과 휴식의 시간이다. 하지만 밤이 늘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중세시대 때까지 밤은 사악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밤에는 도둑과 강도들이 들끓었다. 사람들은 흡혈귀 같은 귀신과 악마들이 활개 친다는 미신에 빠져 있었다.

인간이 밤의 사악한 공포에서 놓여난 것은 전기가 나오고 백열구가 발명된 뒤다. 전기와 백열구가 등장하면서 지구의 밤은 별천지로 바뀌었다. 뉴욕이나 홍콩, 파리와 상하이 같은 대도시의 사무실, 백화점, 쇼핑센터, 주유소, 운동장, 유흥시설 등은 밤에도 온갖 인공조명의 불빛으로 환하다.

전기가 나오기 전까지 밤은 도둑과 야행성 동물들의 무대였다. 야행성 동물은 제 눈동자의 지름을 키우고 허공의 광자(光子)를 모아 어둠을 잘 보는 쪽으로 진화한다. 큰고양이과 동물의 큰 수정체는 어둠 속에서 숫제 파란 불꽃인 듯 빛난다. 반면 사람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식별하지 못하니 무용지물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보는 순간 세계는 가시적 실체를 드러낸다. 물상의 질감과 색과 형상의 양감을 분별하며 본다는 것은 보이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전기가 처음 세상을 밝힌 순간
사람이 대상을 볼 때 느낌과 사유가 일어나고, 이 찰나는 인간이 봄과 보임 속에서 존재를 개시(開示)하는 찰나다. 전기가 나오기 전까지 밤은 오랫동안 인류를 속박했다. 전기와 백열구로 인해 인간은 그 속박에서 해방됐다. 변방 시골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서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악몽의 시간을 몰아낸 순간은 얼마나 경이로웠을까.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쪽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식구들, 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 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꺾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겨우 덜게 되었다/ 궂은 날에도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송찬호 시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시인은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사람의 마음을 온통 경이와 흥분과 기쁨으로 차오르게 했던 순간을 목가적으로 노래한다. 전기의 발명이 늦은 밤 전구 아래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하는 사람들을 다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인공조명 덕분에 밤을 일과 사교를 위한 시간으로 유용하게 쓰면서 생긴 이득을 고루 누린 것은 아니다. 인류는 백열구가 나오기 전과 견줘서 평균 한 시간이나 잠을 덜 자게 됐다.

인공조명 덕분에 인류의 행복지수가 더 높아진 것 같지도 않다. 가축 사육 농장들이 밤새 불을 밝힌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인공조명으로 밤을 낮이라고 오인한 대규모 양계 사육시설의 닭들이 생체교란에 빠져 잠들지 못한 채 자꾸 알을 낳는 행태는 인간의 탐욕이 빚은 자연 생태계의 교란이자 파탄의 증거일 것이다.
밤의 심연에 숨을 필요가 있다
밤의 아름다움과 미지의 신비를 오롯하게 느끼려면 밤을 빛 공해로부터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 미국 국립공원관리공단의 밤하늘팀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어둠의 수준을 조사하고 기록한다. 그들은 밤하늘 보호구역을 지정하고 보존 활동을 펼친다. 밤하늘 어둠의 등급은 1등급에서 9등급까지로 나뉜다. 순수한 어둠만 있는 상태가 1등급인데, 은하수가 지구로 쏟아져 내릴 만큼 어두운 밤하늘을 가리킨다.

인류 문명이 빛의 포화 상태에서 밤을 살해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면서 1등급의 어둠을 가진 밤하늘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인공조명의 난립으로 원시적인 어둠이 빛에 잠식당하자 1등급 어둠을 지닌 밤하늘은 거의 다 사라졌다.

밤의 신비와 미스터리의 명맥은 여전하다. 하지만 진작부터 밤을 지탱하는 어둠의 실존은 위협받아 왔다. 도시 사람은 태곳적 밤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밤이 신이 인간에게 준 유산이자 엄청난 가능성을 품은 자원이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문명 지역의 현대인들은 에너지 과소비와 인공조명의 오남용으로 인해 어둠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감상할 기회도 능력도 다 빼앗겼다.

어쩌면 밤과 어둠을 잃어버렸다는 슬픈 자각조차 없이 밤의 고유한 일정과 그 중심에서 밀려난 순간부터 불행이 인간을 덮친 것은 아닐까. 밤은 상처받은 자아의 은신처다. 인간은 숱한 자아가 우글우글한 낮에서 벗어나 가끔 저 혼자 오롯이 밤의 심연에 숨을 필요가 있다. 인간관계의 상처를 씻어내고 우리를 품으며 회복과 충전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밤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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